1. 죽기로 싸우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18일 조선 한성부 건천동, 현재 서울시 중구 을지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1598년 12월 16일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서 가슴에 유탄을 맞아 전사하셨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에 모셔졌습니다.
조선의 무신이었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인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을 통솔했던 제독으로 대한민국에 대표적인 영웅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는 거의 신화 수준으로 기록되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침략군을 상대하며 천재적인 작전을 펼치며 중앙의 지원조차 없는 상황에 자급자족을 하며 엄격한 원리원칙을 적용하면서도 장병들에게 넉넉한 처우를 보장한 무장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알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음은 물론이고, 그의 전사소식이 전해졌을 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가 슬퍼하였습니다. 현재도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위인으로 꼽힙니다. 이순신의 시호인 충무공은 이순신 이외에 다른 인물들도 받은 시호이지만 많은 한국인이 충무공이란 시호는 이순신 전용 시호로 알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무장이면서도 글을 잘 쓴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의 많은 어록만 보아도 그가 무예뿐만 아니라 글(문)에도 능통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어록은 바로 필사즉생 필생즉사입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 어록은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뜻으로 전투에 임하는 군인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아주 정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인뿐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때 성공을 바란다면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2.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영화 명량은 1597년 10월 26일 전라도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일어난 전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에 속하는 전투로 조선 수군 13척과 일본 수군 133척 이상이 명량수도에서 격돌한 해전입니다. 명량이란 제목은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명은 한자 울다 명을 사용하고 량은 들보 량자를 씁니다. 들보 량은 제방 등 좁은 수로를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한자입니다. 명량해전은 한산도 대첩, 노량 해전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으로 꼽히는 해전입니다.
칠천량에서 크게 패한 조선 수군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릅니다. 이 일로 백의종군을 하고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이순신은 선조의 질투로 백의종군하게 된 것인데, 어쩔 수 없이 복직을 하였지만 상황은 너무 참담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파악한 수군의 상황은 상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칠천량의 패배로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일본군의 대함대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공포가 군영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운명의 1597년 10월 26일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울돌목 앞바다에는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조선 수군의 잔존 병력이 떠 있었고 그들 앞에는 133척이 넘는 왜군의 함대가 떠있었습니다. 왜군은 절대적인 숫적 우위를 자신하듯 포위진을 짜고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의 군선들도 함께 맞서 싸워야 하는데 아군의 배 12척이 겁을 먹어 전진하지 않아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만 적진으로 돌격하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조류도 왜군에게 유리하게 흐르는 밀물이었습니다. 이민서가 기록한 명량대첩 비문을 보면 당시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만이 역류를 받으며 전투에 임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올린 중군영하기와 초요기로 여러 전선들을 소집하였지만 모두가 질 것이 당연하였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다 안위가 탄 함선이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뒤 김응 함도 전장에 가세하였고 때마침 밀물이 잦아들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병력의 차이에 자신감을 가지고 달려든 일본 배들은 물살이 반대로 바뀌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강한 물살에 많은 배들끼리 어키고 부딪치며 침몰한 것입니다. 오후가 되어 완전히 조수가 바뀌어 물살이 역으로 빨라지면서 왜군의 함대는 전장에서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전의를 상실하며 지휘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조선군의 포격으로 일본 수군의 함선들도 순식간에 격파되었습니다. 결국 후방에 있던 대장선까지 격파하며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 일기에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전투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는 후에 난중일기에 기록된 피해보고를 보면 더 실감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조선 수군의 피해가 좌선에서 사망자 2명과 부상자 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좌선만의 피해인지 수군 전체의 피해인지능 명확하지 않지만 어느쪽이든 엄청난 성과임은 분명합니다.
3. 흥행한 해전 영화로 기억될 명량
바다 관련 영화는 전에도 소개한 것처럼 동서양을 불문하고 흥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영화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집니다. 명량의 개봉 이후 평가를 보면 적어도 해전에 대한 부분은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한국기준)
함포전이나 백병전, 충각기동등 해전에서 보여줄 수 있는 대부분으로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국내에서 개봉 하루 만에 85만 명 이상의 관객수를 올렸고 개봉 10일 만에 최단기간 1000만을 돌파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개봉 시점] 최종적으로 1710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한 명량은 흥행에 성공한 영화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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